완벽한 집사의 끝없는 후회: '남아 있는 나날' 속 선택의 대가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 있는 나날'은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집사 스티븐스의 회고록 같은 이야기다. 이 책은 1930~40년대 영국을 배경으로, 자신의 삶을 충실히 살아왔지만 결국 깊은 회한에 빠진 한 남자의 감정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특히 이시구로 특유의 절제된 문체는 읽는 이로 하여금 감정적으로 깊이 빠져들게 한다. 이 소설은 차분하게 시작하지만, 페이지를 넘길수록 주인공의 내면 깊숙한 곳까지 이끌려가게 된다.
줄거리
스티븐스는 은퇴 후 오랜 세월 동안 섬겼던 다윈턴 경의 저택에서 보내는 마지막 시간을 회상한다. 다윈턴 경은 당대의 존경받는 귀족이었지만, 그의 정치적 신념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에 동조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스티븐스는 이러한 사실에 크게 개의치 않고 자신의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하는 데 몰두한다.
스티븐스가 회고를 시작한 계기는 다윈턴 경 사후, 저택이 미국인 새 주인인 파라데이 씨에게 팔린 후다. 파라데이 씨는 미국식 사고방식을 지닌 사람으로, 집사의 완벽주의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이 점이 스티븐스에게는 충격이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의 집사로서의 정체성을 지키려 애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스티븐스는 점점 자신이 속했던 세계와 그 가치가 무너지고 있음을 깨닫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스티븐스는 옛 동료인 켄턴 양에게 편지를 쓰게 되고, 그녀를 만나러 가기로 결심한다. 스티븐스는 과거 켄턴 양과의 관계에서 감정적으로 미묘한 순간들을 회상한다. 그들은 같은 저택에서 일하면서도 정서적 교류가 적었다. 켄턴 양은 종종 스티븐스에게
"당신은 그저 로봇 같아요. 감정이란 게 없는 건가요?"
라고 비꼬았지만, 스티븐스는 언제나 무표정하게 이를 받아넘겼다.
여행 중 스티븐스는 다윈턴 경과 함께했던 중요한 순간들을 떠올린다. 다윈턴 경은 언제나 스티븐스에게 충성을 요구했고, 스티븐스는 이에 흔들림 없이 답했다. 한 번은 다윈턴 경이 중요한 외교회의를 준비하는 날, 스티븐스는 아버지가 병으로 사경을 헤매는 와중에도 절대 자리를 뜨지 않았다. 다윈턴 경의 중요한 손님들을 맞이해야 했기 때문이다. 스티븐스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에야 그의 방을 찾았다.
"난 내 일을 했다"
며 자부심을 가졌지만, 그날 이후로 그는 아버지와 화해할 기회를 완전히 잃어버린 것이다.
켄턴 양과의 관계도 비슷했다. 그녀는 다윈턴 저택을 떠나 결혼했지만, 스티븐스는 그녀의 감정적인 호소를 외면하고 자신의 일에만 몰두했다.
"스티븐스 씨, 당신은 정말로 행복한가요?"
라는 그녀의 질문에도 그는
"저는 다윈턴 경을 섬길 수 있어서 충분히 만족합니다"
라는 답을 내놓았다. 이 무미건조한 대화는 그들의 관계를 끝내버렸다.
여행의 종착지에서 스티븐스는 켄턴 양과 재회하지만, 그녀는 이미 나이 들어 있고 삶은 너무 멀리 흘러가 버렸다. 켄턴 양은 과거의 감정을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이제 너무 늦었어요, 스티븐스 씨. 우린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어요"
라고 말한다. 스티븐스는 자신이 모든 기회를 놓쳤다는 것을 깨닫는다.
리뷰
'남아 있는 나날'은 속도감 있는 소설은 아니지만, 감정의 깊이를 천천히 파고드는 작품이다. 주인공 스티븐스는 완벽한 집사가 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감정과 욕망을 억누른 채 살아왔고, 그 결과 그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들을 놓쳤다. 이 과정에서 독자는 그가 느끼는 무력감과 후회를 함께 경험하게 된다.
특히 스티븐스의 대사들은 그의 내면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저는 제 일을 할 뿐입니다"
라고 반복할 때마다, 그가 자신의 역할에 얼마나 집착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뒤에 숨겨진 고독과 후회가 더욱 선명해진다. 켄턴 양과의 관계는 그가 감정을 억누르고 살아온 인생의 대표적인 사례다. 그가 더 인간적인 감정을 드러냈다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었을지 모른다는 아쉬움이 끊임없이 독자를 괴롭힌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문체는 절제되어 있으면서도, 그 안에서 감정의 파도를 세심하게 그려낸다. 대사 하나, 행동 하나가 인물들의 복잡한 감정선을 나타낸다. 독자는 스티븐스의 회상 속에서 그가 겪었던 수많은 감정적 갈등을 점점 더 깊이 이해하게 되고, 결국 그의 삶에 대한 깊은 연민을 느끼게 된다.
이 책을 싫어할만한 분
이 소설은 느린 전개와 섬세한 감정 묘사를 중심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사건 중심의 극적인 전개를 선호하는 독자에게는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다. 스티븐스의 내면적 갈등을 탐구하는 과정이 주를 이루기 때문에, 빠른 전개나 분명한 결론을 기대하는 독자에게는 적합하지 않을 수 있다. 특히 감정적으로 억제된 주인공의 이야기가 어떤 이들에게는 답답하게 다가올 수 있다.
끝맺음으로
'남아 있는 나날'은 우리가 삶에서 무엇을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지, 그리고 감정과 충성을 어떻게 조율해야 하는지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스티븐스는 자신의 직업적 자부심을 지키기 위해 인간적인 관계를 포기했고, 그로 인해 결국 자신의 삶을 놓치게 되었다. 이 소설은 이러한 회한과 후회의 감정을 섬세하게 풀어내며, 읽는 이로 하여금 자신의 삶과 선택을 되돌아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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